52 '난타' 안 본 사람 수십억 … 나는 아직 배가 고프다 2014.02.13

 http://joongang.joins.com/article/aid/2014/02/13/13467510.html?cloc=olink|article|default

글=이지영 기자
사진=권혁재 사진전문기자


 

'난타' 관객 1000만 돌파 눈앞
17년 세계를 두드린 송승환

 
‘난타’ 제작자 송승환 PMC프러덕션 회장이 서울 명동 난타전용관 무대에 섰다. 그는 “올 여름 관객 1000만명 돌파를 앞두고 그동안의 ‘난타’ 역사를 모두 기록한 1000쪽짜리 ‘난타백서’를 만들고 있다”고 했다. [권혁재 사진전문기자]

“‘난타’ 안 본 관객이 아직 수십억 명이에요. ‘난타’의 세계 시장은 여전히 넓습니다.”

 1000만 관객 돌파를 앞둔 ‘난타’의 제작자 송승환(57) PMC프러덕션 회장의 포부는 세계를 향해 있었다. “국내 공연 시장은 너무 작아 도저히 수익을 낼 수 없다”는 판단으로 해외 관객을 겨냥했던 17년 전 초심 그대로다. 1997년 서울 호암아트홀에서 초연한 ‘난타’는 그동안 49개국 286개 도시에서 2만8500여 차례 무대에 올랐다. 매일 ‘난타’를 공연하는 전용관만도 서울 명동과 충정로, 제주, 태국 방콕 등 네 곳. 올 7∼8월쯤이면 총관객 1000만 명을 돌파할 전망이다. 이 중 80% 가량이 우리나라를 찾아온 외국인 관광객이다.
 
 “세계 무대에서 통하려면 언어장벽 없는 비언어극이 좋겠다 생각했어요.”

 ‘난타’는 전통 사물놀이의 신명나는 리듬을 현대 공연 양식에 접목시켜 만든 타악 퍼포먼스다. 초연 예술감독은 사물놀이의 대가 김덕수(62)씨였다. ‘난타’의 리듬은 대부분 칼로 도마를 두드리는 과정에서 나온다. 17년 동안 오이·당근 각 29만개씩, 양파 11만개, 양배추 20만개가 ‘난타’ 무대에서 썰려나갔다. 칼 1만8000자루, 도마 2000개도 닳아 못쓰게 됐다. 배우들은 현란한 칼솜씨 훈련만 6개월을 받아야 ‘난타’ 무대에 설 수 있다. 영화 ‘내 아내의 모든 것’에서 보여준 류승룡씨의 ‘칼질 묘기’는 류씨가 98년부터 4년 여 동안 ‘난타’ 배우로 활동하며 익힌 기술이다.

 ‘난타’의 탄생 배경엔 송 회장의 배고픈 과거가 있다.

 65년 여덟 살에 아역 배우로 데뷔한 그는 85년 돌연 모든 활동을 그만두고 미국 뉴욕으로 떠났다. 현재의 아내인 동갑내기 약혼자와 함께였다.

 “77년 대학(한국외대 아랍어과) 2학년 때 학교를 그만두고 전업 배우가 됐어요. 80년 ‘젊음의 행진’ MC를 맡으면서 대중적인 스타가 됐죠. 라디오 DJ도 하고, 일일 드라마에도 나가고, 영화도 두세 편 찍고, CF도 여럿 하고….”

 그렇게 밤잠 줄여가며 5년여 활동하는 동안 아파트 몇 채 살 정도의 돈을 모았다. 하지만 부모님 사업이 망하면서 하루아침에 빈 손이 됐다.

 “젊었을 땐 돈을 버는 것보다 많을 걸 보고 듣고 느끼는 게 더 큰 재산이겠구나 싶더라고요. 말로만 듣던 브로드웨이 뮤지컬을 직접 보고 싶어 무작정 미국으로 갔지요.”

 그는 벼룩시장 좌판에서 장사를 했고, 그의 아내는 네일숍에 취직했다. 주중엔 둘이 그렇게 돈을 벌고 주말엔 실컷 공연을 봤다. ‘난타’에 영감을 준 비언어극을 처음 접한 것도 그 때였다.

 “피터 슈만이 연출하는 ‘빵과 인형(Bread & Puppet))’ 극단의 인형극을 봤어요. 대사 한마디 없는데 재미와 감동을 준다는 게 신기했죠. 참 다양한 형식의 공연이 있구나 깨달으면서 머리가 트이는 느낌이 들더라고요.”

 3년6개월 만에 귀국한 그는 공연 제작자로 나섰다. “연출자·작가에게 뽑혀야 기회 얻는 배우의 수동적인 입장이 싫어” 시작한 일이었는데, “내 머릿속 아이디어가 무대 위에서 구체화는 것을 바라보는 희열이 컸다”고 했다. 96년 주식회사 형태의 공연 제작사 PMC프러덕션을 만든 뒤 “영리기업으로서 수익을 올려야 한다”는 의욕으로 제작한 첫 작품이 바로 ‘난타’다. 초연 이후 브로드웨이에서 ‘쇼닥터’라 불리는 전문가들을 초빙해 ‘글로벌 보편성’을 더하는 작업을 했고, 99년 에딘버러 프린지 페스티벌 무대에 올려 세계 공연계의 화제작으로 부상했다.

 “53회째 에딘버러 페스티벌이었는데, 한국 작품이 참가한 건 ‘난타’가 처음이었어요. 참가비용 3억원 마련하려고 빚까지 얻었는데, 한 달 공연하면서 미국 디즈니월드, 일본 공연 기획사 ‘프로막스’와 계약이 이뤄져 그 돈을 다 벌었습니다.”

 그 뒤로 ‘난타’는 줄곧 PMC프러덕션의 효자 노릇을 한다. 지난해 매출 230억원. ‘난타’에서 번 돈으로 그동안 PMC프러덕션은 ‘남자충동’ ‘달고나’ ‘형제는 용감했다’ 등의 연극·뮤지컬을 제작했다.
 
 “‘난타’엔 큰 변화를 주지 않을 생각입니다. ‘난타’를 계속 키우면서, 동시에 세계 시장에서 통할 또 다른 비언어극을 만드는 게 앞으로의 과제지요. ‘카바레 퍼포먼스’를 표방하고 2012년 만든 ‘뮤직쇼 웨딩’에 기대가 큽니다. 배우들이 직접 악기 연주하고 춤추며 노래하는 일종의 ‘쇼’인데, 관객들에게 흥겨운 에너지를 전달한다는 면에서 ‘난타’와 꼭 닮았거든요.“